젊은 시절 한 여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극악무도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오랜 수감기간 중 종교에 귀의하여 새로운 삶을 갈망하게 되는데, 모범수로 인정받아 자유의 몸이 된 이 남자는 세속과 거리를 두며 신의 가르침을 좇는 평온한 여생을 영위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감옥을 나선 남자를 그림자처럼 줄곧 따라다니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는 청년 시절의 남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여인의 아버지였다. 노인이 되어 나타난 그는 새 사람으로 거듭난 남자의 삶에 개입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따름이다.
남자를 향한 일말의 증오심이나 회한마저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말없이 딸의 원수를 바라보는 노인의 준엄한 시선은 이 남자로부터 신이 약속한 용서와 자유의 축복을 앗아가 버린다. 과거의 살인자는 이내 자신이 살아있는 한 오랜 세월 그토록 힘겹게 벗어나려 애썼던 죄악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에게 신이 가한다는 지옥의 형벌을 통해 노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목을 칼로 그어 천천히 죽어가는 남자의 눈앞으로 미소 짓는 노인의 얼굴이 비친다. 이내 칼을 꺼내든 노인은 그 역시 스스로의 목을 베어 지옥으로 향한 남자의 뒤를 쫓는다.
영화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콜린 패럴이 분한 시나리오 작가를 통해 발화된 이 스산한 우화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들에서 엿보이는 인물들의 죄의식, 그리고 속죄를 갈망하는 군상들의 참회를 무참히 짓누르는 지옥도로서의 세계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킬러들의 도시>에서 우직한 살인청부업자 레이(콜린 패럴 분)는 임무수행 도중 실수로 살해한 어린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가책을 느낀다. 이름 모를 또 다른 누군가를 살해하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주에 당도한 두 명의 킬러는 역설적이게도 히로니뮈스 보스가 그린 섬뜩한 지옥도(<최후의 심판>)를 바라보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유년시절을 회고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연옥’으로 은유된 브뤼주는 이미 무수히 많은 죄를 범한 킬러들의 운명을 집어삼키는 참혹한 무대가 된다.
죄의식과 구원에의 갈망에서 기인한 인물과 세계와의 대결이 앞선 마틴 맥도나 영화들의 주된 테마였다면, 영화 <쓰리 빌보드>는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분)라는 강렬한 여성캐릭터를 앞세우며 다소 이질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 밀드레드는 자신이 거주하는 낙후한 소도시 에빙에서 발생한 끔찍한 강간살인사건으로 딸을 잃은 중년여성인데, 그녀는 자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부모로서의 자책과 아울러 딸을 죽인 범인을 좀처럼 잡지 못하는 공권력의 무능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밀드레드는 수사에 소극적인 경찰의 무능을 질책하고자 도로 외곽에 설치된 세 개의 광고판을 임대하는데, 그녀가 광고판에 걸어둔 원색적 문장의 규탄문("강간당한 내 딸이 죽었는데 윌러비 서장은 왜 범인을 체포하지 않는가?")은 경찰 당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주민들의 공분을 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밀드레드의 광고문이 가리키는 지탄의 대상은 에빙의 경찰서장인 윌러비(우디 해럴슨 분)로,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깊은 신망을 얻은 인물임과 동시에 췌장암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세상사의 자질구레한 책임들로부터 다소 비껴난 처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에빙을 대표하는 ‘모범적인 가장' 윌러비에 대한 밀드레드의 분노는 곧 이웃의 딸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방관자들을 향한 책임추궁으로까지 받아들여진다.
밀드레드의 광고판은 비단 딸을 잃은 소시민과 무력한 공권력 사이의 갈등만을 촉발시킨 것이 아니다. 광고판이 기폭제가 되어 표면화된 에빙의 갈등은 젠더와 인종, 세대와 계급 간의 첨예한 대립을 아우른다. 이러한 대립은 뚜렷한 명분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맹목적이다. 윌러비 서장의 지휘 아래 경찰로 근무하는 딕슨(샘 록웰)은 아마도 이러한 맹목성의 극단적 화신일 것이다. 그는 막연한 신념으로 흑인을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임과 동시에, 경찰에 복종하지 않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어설픈 계급론자이기도 하다. 피아를 나누는 그의 사고방식은 어떠한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립되는 상대에 대한 본능적 경계와 혐오에 가깝다. 월러비와 대척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버린 밀드레드는 이렇듯 에빙에 만연한 들끓는 혐오와 맞닥뜨리게 된다.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에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분한 경찰서장 마지는 극 중 자행되는 참혹한 범행들의 말미에 유일하게 생포된 살인범을 바라보며, 준엄한 집행관의 지위에서 벗어난 자연인으로서의 보편적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 경멸과 연민이 뒤섞인 그녀의 황망한 얼굴은 비뚤어진 욕망의 난장 가운데서도 일말의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갈구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진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얼굴은 이렇듯 억척스러우면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 마지의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에서 그녀가 체현한 밀드레드는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악행들에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인 선량한 이웃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을 향한 세간의 분노를 수동적으로 묵인하지 않고,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때로는 폭력적 행동마저 서슴지 않는 밀드레드의 극단적 양태는 역설적이게도 자못 정직해보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감정의 직설적 표출은 비단 밀드레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시대의 분위기에서 얼마간 비껴난 듯한 목가적 배경 가운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은 극 중 자행되는 폭력적 언행들에 어느 정도 이골이 난 상태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밀드레드를 비롯한 에빙의 인물들이 발하는 분노의 경중이 아닌, 각기의 분노가 가리키는 방향이라고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밀드레드의 딸을 죽인 범인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을뿐더러, 극의 도입부에서부터 애당초 밀드레드가 드러낸 분노의 감정은 월러비로 대표되는 경찰조직, 더 나아가 그를 옹호하는 에빙의 사람들을 향해 있다. 범인이 증발해버린 살인사건의 무대 가운데서 서로의 책임을 물으며 벌어진 첨예한 대립은 각자의 기저에 도사린 분노의 감정을 폭력의 양태로 표출시킨다.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할 대상이 부재한 지난한 갈등 가운데서, 서로를 향해 준동하는 것은 방향 잃은 증오와 혐오의 감정뿐이다.
어쩌면 이러한 극의 양상은 마틴 맥도나 감독이 전작들에서부터 관철한 지독한 염세주의의 연장일지도 모른다. ‘분노가 분노를 낳는다’는 영화 속 대사는 새삼스레 극 중 인물을 추동하는 계시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틴 맥도나의 세계관을 이루는 거역할 수 없는 공식을 재차 환기시키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을 둘러싼 죄의식과 증오의 연쇄를 끊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의 일화에서처럼, 세상사를 둘러싼 지리멸렬한 갈등과 책임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몸소 생을 마감한 윌러비 서장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밀드레드와 딕슨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초월적 존재가 된다. 이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집요하게 인간세계를 추동하는 분노의 지배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지독한 환멸에 가닿는다.
이런 점에서 두고 보자면, 영화의 말미에 밀드레드와 딕슨이 성폭행범이자 살인범으로 ‘미루어 짐작’한 이름 모를 한 남자를 살해하기 위해 차 트렁크에 엽총을 싣고 떠나는 마지막 여정은 흡사 서늘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두 인물은 자신들이 죽이려 하는 대상이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인물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을뿐더러, 구태여 자신들이 집행자로서 나서는 것이 온당한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확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쓰리 빌보드>의 이 결말은 불화의 수렴점에서 만난 두 인물이 화해와 구원의 가능성을 온전히 포기해버렸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종의 체념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체념은 끝나지 않은 분노의 연쇄가 언제든 촉발되고 말 것이라는 점화신호다.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