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사회와 맺는 관계를 논한 수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그 어떤 이론도 <루시>에게 빚준 바 없는 것이고 거기에 대부분의 영화들이 있는 지형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루시>가 특출한 바 없는 대중적 영화라서 대중적인 다른 영화에게도 영화 언어, 영화 조형으로는 할 만한 지위의 발언은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관계에서 우리들은 방화들에게서도 같은 관계를 찾는 것이다. 영화가 그다지 신비화되지 못하는 시대인 것이다. 신비롭지 못하여 아우라를 탈취당하고 해부되고 해체된 유골품 같은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고 그 장치들에서 <루시>를 본 것이다. <루시>를 만약 다른 어떤 동시대 영화들처럼 신비로운 몰두를 찾는 것으로 인식하려면 그 골무를 벗기고 영화의 정신분석, 정치학을 필히 찾아야 한다. 필요없는 일들을 하는 게 원래의 영화의 취지들인 것이고 필요없는 사람들이 모인 것에 필요없는 사람들이 다시 찾는 게 영화보기이다. 필요없는 남루한 관객들이 항시 남는 시간에 건전하지도 생산적이지도 않게 시간 태우는 모닥불변이 그곳 극장이다. 우리는 영화에 꽃들을 날려야 한다.
<루시>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루시가 어떤 마약류 운반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신비적인 약물 작용 때문에 비현실적인 초인이 되고 그녀에게 원한 품은 자들과 대립하다가 비현실적인 디지털초인으로 도처에 편저하게 된다라는 허황되고 허망한 줄거리다. 어떤 영화인가 감이 잡히는가(만약 당신이 관람하지 않았다라면)? 헐리우드 오락 영화의 모듈에 지배되는 영화지만 프랑스영화, 유럽영화라고 브랜드가 붙어있다. 제작사, 감독이 비미국인이니까. 전형적인 미국 영화라고 해도 누구도 안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난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미국영화, 미국 공화당 쪽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미국영화의 하나로서 파악하고 예단하고 있는 것이고 공식적으로 붙인 원산지 표시 따위를 벗어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공식적 원산지 표시에 미국을 달아 놓는게 유럽 표시를 다는 것에 비해 영화경제학적으로 얼마나 더 유리하고 그러므로 그러려면 추가비용을 얼마나 더 내야 하는가 알고 있어, 이런 병자도 아닌 을자를 갖는 영화들을 몇몇 더 알고 있는 것이다. 갑자를 달면 좋겠지만 병자를 달지 않은데 만족하는 것이다.
<루시>는 스칼렛 요한슨이 분하였고 최민식이 대항인물로 등장한다. 스칼렛 요한슨은 이름만으로는 북유럽계(스웨덴)인 것 같다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는 이민 2~3세대쯤의 미국인 같다. 최민식은 이 영화의 주요 백인 관객들에게는 중국인이거나 대만인이거나 일본일일 수 있는 것이고 한국인일 수도 있다. 심지어 북한인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다른 관객층, 소비층인 아시안, 제3세계 국민들에게는 한국(남한)출신이라는 점이 어떤 모종의 아우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한국인에게 맺는 관계는 우리들이 일부 2류 유럽국가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유사하다. 이러한 인종의 정치학, 인종의 정신분석, 인종의 서열화를 마케팅적으로 작동시키는 자리에 백인의 영화, 공화당의 영화의 '고삐'가 매섭게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백인들의, 미국이라면 지배적(헤게모니적) 공화당의 정치와 폭력은 한국에서 개봉하거나 2류국가들에서 개봉하는 거의 모든 외화에서 작동하고 있고 그것은 글로벌한 순응적 관객대오, 더 나아가 순응적 국민국가 그룹을 재생산하는 데에 중요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일조를 하는 것이고, 정치학자 알튀셰르의 용어로 라면 우리들과 그들은 그렇게 호명(interpellation)되는 끝과 도정에 있다. 진정한 우리들은 사라지는 것이다. 루시가 상징하는 바 처럼 그 이후에는 도처에 편재하게 되는 것이다. 덩어리로는 편재하고 개별적인 주체(자아)로는 분쇄된 우리들은 부시의 눈망울에도 어떤 메이저 제작자의 계산기에도 존재하는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