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에 작게 개봉했던 코고나다의 영화 <콜럼버스>(Columbus, 2017)에 등장하는 사소하지만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건축을 좋아하지만 도서관에서 일하며 엄마를 돌보는 케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는 진(존 조)과 어느 건축물 앞에 서있다. 진은 건축가인 아버지가 쓰러지자 서울에서 미국의 콜럼버스로 급하게 왔다가 우연히 케이시를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 참이다. 케이시는 자신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건축물이라며 그들 앞에 있는 은행 건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근대적 은행이며, 통유리로 되어있고, 어둡고 딱딱했던 과거의 은행들과 다르게 설계되었다는 식의 내용이다. 이때 가이드처럼 굴지 말라며 진이 그녀의 설명을 멈춰 세운다. 건축물에 얽힌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이 이 건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듣고 싶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종종 콜럼버스의 건축물들에 대해 가이드식 설명을 연습하곤 했는데, 가이드가 되는 것이 그곳을 떠나 건축을 공부하러 대학에 가지는 못하는 처지에 대한 절충안 정도라고 여겼을 것이다. 또한 이 장면에서 케이시가 설명하는 내용은 영화의 초반부, 일군의 관광객들을 이끄는 가이드가 했던 설명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망설이다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흥미롭게도 그 말이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음악이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서고, 케이시는 건물에 대한 자신만의 감상을 말하는 중인 것 같다. 진도 그 말에 흥미를 보이며 대화를 이어간다. 우리는 어떤 말은 들을 수 있지만 어떤 말은 들을 수 없다. 마치 여러 층, 혹은 겹을 두른 것 같은 이러한 구성은 영화의 표면에 일종의 깊이와 두께를 만들어낸다.
<콜럼버스>가 시공간을 담아내는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표면이 사실은 여러 겹으로 덮여있고, 스크린이 그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때 깊이와 두께가 느껴진다. 이는 종종 집 안의 벽이나 문, 도서관의 책장과 같은 사물들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사물들은 텅 빈 공간에 겹겹이 놓여 일종의 원근법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대화하는 인물들 사이사이에 들어선 책장, 집안의 공간을 나누는 벽과 같은 사물들은 깊이를 드러내는 평면 위의 평면들이다. 또한 거울의 사용도 인상적이다. 진의 아버지의 제자이자 진과도 절친한 사이인 엘리노어(파커 포시)의 호텔방에 놓인 거울을 떠올려보자. 취기가 오른 그들이 젊고 어렸던 지난날을 회상하고 진이 엘리노어에게 키스할 때, 우리는 그 장면을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카메라의 시야각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고, 그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면에는 거울이 배치된다. 카메라가 바라보고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도 거울을 통해 드러나며, 두 사람의 넘실대는 감정은 조형적 배치 안에 슬며시 담긴다. 이를테면 <콜럼버스>의 스크린은 직사각형보다는 직육면체로 체험되는 것 같다.
물론 결정적인 소리를 들려주지 않거나 거울과 같은 사물,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평면의 스크린에 입체감을 도입하는 기법은 매우 흔한 것이다. 그런데 <콜럼버스>의 경우, 그러한 입체감이 프레임의 차원을 넘어 영화의 전체적 구성에까지 확장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말하자면 영화가 하나의 직육면체이다. <콜럼버스>의 인물들은 종종 동일한 구도를 유지하며 급격한 시공간의 격차를 만들어 내거나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제스쳐를 공유하고, 서로 다른 공간을 순식간에 넘나든다. 영화의 흐름을 프레임의 평면적 나열이라고 생각한다면 때로 어색하거나 세밀한 시공간적 통일성이 깨진다고 여겨질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를 프레임이 겹쳐지고 쌓여진 일종의 직방체로 바라볼 때 훨씬 수월하게 인식된다.
영화에서는 무언가 바라보는 케이시의 모습이 화면상의 구도가 그대로 유지된 채 배경과 옷만 바뀌는 형태로 반복되고, 어느 날 아침 서로 다른 시간 혹은 공간에 있음이 분명한 세 인물(케이시의 엄마, 진, 케이시)이 샤워를 준비하고, 씻고, 마친 후 거울을 보는 행위를 각자 수행함으로서 마치 행위를 서로 나누어 공유하는 것 같은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혹은 영화의 후반부, 케이시와 진이 불 꺼진 학교에 몰래 들어간 장면에서는 화면 전환을 통해 학교의 복도가 순식간에 진이 머물고 있는 밀러하우스의 복도로 연결된다. 마치 멀리 떨어진 거리를 접어 이동을 가능하게 만든 것 같은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우리는 3차원의 직육면체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의 이동과 활동을 단면으로 나누어 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며, 건축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생기는 오해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콜럼버스>를 건축물로서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 영화는 하나의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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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동하고 머물며 떠나고 망설인다. 케이시는 이를테면 이 건축물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어 여기저기에 감정들을 숨겨두는 인물이다. 약물중독의 과거를 가진 엄마에 대한 복잡한 마음과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떠나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들이 그녀가 방문하는 곳곳에 조금씩 남겨진다. 새어나오지 않도록, 눈물은 흘리더라도 울음은 터뜨리지 않도록 애써 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어쩌면 영화 전체의 축소판인지도 모르겠다. 케이시는 영화의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고 있지만 더 이상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완전한 이방인인 진은 자신은 방치한 채 일과 학생들에게만 매달려온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을 가진 인물이다. 그와 관련된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자신의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에 걸었던 길을 그가 반복해서 걷는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떨어져있지만 구성적으로는 같은 그러한 움직임을 통해 진 역시 영화의 건축적 성격을 받아들인다. 사소하게 반복되는 도시의 교량이나 골목의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콜럼버스>라는 건축물의 거주자들처럼 느껴진다. <콜럼버스>는 건축의 영화이듯이 또한 거주자들의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끝내 케이시는 콜럼버스를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영화가 내내 그랬던 것처럼 결단의 순간은 어딘가에 숨겨져 등장하지 않지만, 마침내 영화의 바깥을 바라보는 케이시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와 자리를 바꾸는 사람은 진이다. 이방인이었으며 아직은 콜럼버스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렵다던 그는 깨어나지 않는 아버지가 있는 이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물기로 결심한다. <콜럼버스>는 일면 느긋하고 여유로운 영화 정도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지만, 평면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더 나아가 영화를 건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에 대한 세밀하고 믿음직스러운 탐구이기도 하다.
글 :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