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굴을 통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영화는 얼굴 없이는 불가능한 매체이다. 정확하게는 인간 없이는 불가능한 매체이다. 영화는 현실의 움직임 중에서 특히 인간의 움직임을 실재와 똑같이 보여주면서 탄생했고, 얼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어떤 수단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미묘한 감정 흐름을 일정 시간 동안 지속하는 얼굴 이미지를 통해 표현해내는 일은 그 어떤 예술도 해낼 수 없었다고 영화 이미지학의 대가 자크 오몽은 말한다. 얼굴을 읽으면 영화가 보일까. 오늘은 이태경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통해 한 편의 영화를 읽으며 그 답을 찾으려 한다.
킴브라(Kimbra)가 부른 <정착하는 거야 Settle down>라는 배경음악으로 육즙이 가득한 복숭아를 먹는 배우 이태경의 입이 클로즈업된다. 성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복숭아 장면은 한 남자에게 함께 정착해서 살자고, 그리고 아이를 낳자는 노골적인 구애로 시작된다. 그녀는 단편영화 <제 팬티를 드릴게요>에서 좋아하는 남자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고 구애하는 절박한 여성 캐릭터로 나온다. 이 절박한 구애는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 남성을 향한 욕망과 사랑이 범벅이 된 감정에 기인한다. 그를 바라보는 이태경의 시선은 그 시선을 받고 부담스러워할 타인에 대한 배려나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평소에 그녀가 무례해서가 결코 아니다. 단지 지금은 ‘내 감정의 파열’이 너무 격렬하기 때문이다. 짝사랑이다.
한 남자에게 느낀 감정의 부피가 너무 커, 타인의 생각이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 여자는 자신의 긴 머리를 만지며 부드럽다고 부러워하는 남자의 속내를 읽지도 읽을 생각도 못한다. 그녀의 눈엔 콩깍지가 씌었고 마음은 온통 그에게 사로잡혀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고 감성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충동질할 뿐이다. 그녀는 남자가 간접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저 주체할 수없이 끓어오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고, 그렇게 육체적인 과감한 시도를 하고도 그저 겸연쩍은 듯 웃을 뿐이다. 짝사랑의 열병엔 ‘내가’ 달리할 일이 없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그를 대할 때만 긴장되고 가장된 모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비난하는 다른 선배에게 이태경은 비로소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 이태경의 목소리 톤은 신중하지만 할 말을 하는 차분한 당당함이 베여있다. 그래서 다른 선배에 대한 이태경의 태도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다. 짝사랑은 그 앞에서라면 평생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직진만 하던 그녀 앞에 영화는 노래 한 곡을 들려준다. 이 영화에 나오는 두 번째 음악은 알모도바르가 불완전한 사랑 혹은 혼자만의 사랑을 이야기한 영화 <그녀에게>에게서 흘러나왔던 <꾸꾸루꾸꾸 빨로마 cucurucucu paloma>다. 이 노래는 일종의 슬픈 사랑 노래이기도 하고 일종의 진혼곡이기도 하다. 관계가 진전될 거라는 기대에 차있던 그녀가 남자의 진심 아니 진실을 아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으로 뒤덮인다. 짝사랑을 멈추게 한 진실이 그녀에겐 너무 잔인하다.
구애에 실패하고 돌아서는 남자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이제 슬픔만이 남아있다. 열에 들뜬 이전의 모습과는 완연히 다른 그녀의 모습은 바람이 서서히 빠져나간 풍선처럼 이 사랑은 더 이상 어떤 기약도 희망도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절망이 가득하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는 잠시 바람이 지나갈 시간이 필요하다. 그땐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것처럼 높은 장막이 드리워진다.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잠시의 여백, 그때 여자의 표정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껍질처럼 무표정하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지만 어쩔 수 없음을 이제는 여자도 안다. “미안”이라는 남자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안다. 죽을 것 같았던, 찢어질 것 같았던 격정의 파도가 이제는 나를 편안한 해변으로 보내 줄 것 같은 안도감마저 드는 터져 버릴 것 같은 시간이었다. 밀려오는 눈물을 흘려보내며 함께 그도 보내야 할 시간임을 그녀는 직감한다.
세월이 흘러, 그에게서 한 장의 편지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좀 더 담담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볼 수 있겠지. 간절히 그가 필요했던 때를 기억해내며 다시 웃을 수 있는 내가 되어간다.
배우 이태경은 2011년 <대단한 개털>(2011)로 연기를 시작했다. 잠시의 공백 후 <제 팬티를 드릴게요>(2015), 동정녀 마리아가 되길 바라는 목사의 딸을 연기한 <안나>(2015), 동성 연인을 연기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2016)를 통해 다양한 얼굴을 선보였다. <너와 극장에서>(2017) 두 번째 에피소드 <극장에서 한 생각>에서 영화감독 ‘가영’ 역을 맡아 거침없는 성격과 솔직한 입담을 가진 캐릭터를 감각적이고 실감 나게 표현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은 임태규 감독의 장편 <파도치는 땅>(2018), 허지예 감독의 단편 <졸업>(2018) 등에서 그녀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안나> |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 |
영화의 특성은 육체를 통하여 사유를 기록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태경은 우리의 사유를 확장하고, 더 나아가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까지 사유를 창조해내는 많은 얼굴을 가진 배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글: 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이자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