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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 <블랙팬서>를 보며 문득 든 몇 가지 생각

2008년 <아이언맨>의 갑작스런 성공으로부터 시작된 듯 보이는 마블코믹스(Marvel Comics)의 영화 세계는 2013년을 기점으로 매년 2~3편의 영화를 선보이며 그들의 세계를 확장해왔다. 굳이 연도를 이야기한 이유는 그들의 영화를 어느 순간인가부터 연례행사처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블의 각 영화마다 간직한 이야기와 그들의 세계관, 우주론 등은 수능만점을 염원하며 공부하는 수험생에 견줄만한 덕후들이 즐비하므로 더 이상 재론할 생각은 없으나,<블랙팬서>에서 등장하는 ‘원주민’, ‘아프리카’, ‘최빈국’ 등등의 열쇠말이 그동안 마블세계에서 보여주었던 마법과도 같았던 ‘테크놀로지’와 엮이니 묘하게 드러나는 의미가 있어서 그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마블의 세계가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유는 놀라운 이야기 덕이라기보다 상상했던 모든 것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기술의 발달 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이미지 기술 덕분에 모든 불가능을 가능할 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블 영화의 특징이라고만 할 수 없는, 어쩌면 헐리웃 영화 모두가 섭렵하게 된 이러한 CGI의 기술은 있을 수 없는 일들에 논리적인 힘을 부여하여 오히려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세계로 거듭나게 하고 있고 이것은 곧 단순한 서사에 어떤 힘이 있는 것처럼 강력한 착시 효과를 강화한다. <블랙팬서>는 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에 이 개념을 덧씌운다. 지금 나는 인종차별 문제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를 제외하고 대체로 ‘맨’으로 끝나는 영화제목에서 유독 ‘표범’이라는 이름을 단 주인공을 등장시키려는 이유와 한 인간이 한 국가의 왕이었다가 폐위당하지만 어찌어찌하여 다시 왕이 되는 신화성과 CGI의 기술적 재현 속에 서려있는 무지막지한 논리적 이해의 단순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그 단순성은 부산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간을 어렵게 견뎌낸 이후 극에 달한다. 먼저 블랙팬서는 짐작하건대 왕으로서 용맹하고 정의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영웅으로서 시련을 겪게 되지만 왕위는 반드시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빤한 플롯에서는 서사의 수축과 이완을 경험하기 힘들다. 하지만 ‘표범’의 뜻을 지닌 ‘팬서’의 의미는 조금 특별할 수 있다. 마블 영화의 제목이 모두 ‘이름’ 혹은 ‘별칭’인 점에서 보면 특히 그렇다.

2008년부터 시작된 마블 영화는 CGI 기술력이 발달하면 할 수 록 귀찮다는 듯이 주인공의 별칭을 제목 그대로 삼아왔다. 마블 코믹스의 원작에 충실하겠다는 의도와 원작자인 스탠 리, 잭 커비, 스티브 딧코의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겠다는 의도도 분명 숨어있겠지만, 대체로 그들의 이름 혹은 별칭을 그대로 가져온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앤트맨 등이 그러하고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등이 그러하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또 어떤가.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실명으로는 그 어떤 정체성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기자들 앞에서 ‘I’m Iron Man’이라고 호기롭게 말한 이후에도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마블 영화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이름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블랙팬서 만큼은 별칭 혹은 맨이 아닌 ‘표범’이다. 브라질 원주민들의 신화를 연구한 프랑스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표범은 원주민들의 신화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동물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표범’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존재이며, 인간에게 한 없이 너그러운 존재다. 불을 가져다 주었으며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표범’은 원주민들의 기원적 존재이기도하다. 반면 대부분의 마블 캐릭터는 자신의 이름 속에 정체성의 문제로 깊이 접근할 만한 의미를 찾기 힘들다. 더욱이 대부분 등장인물은 정체성의 혼동을 겪거나 기존의 자신의 모습을 거의 잃은 캐릭터로 등장한다. 특히 주변인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마블의 캐릭터들 역시 자신들이 누구인지 답을 내린 자가 없다. 스스로를 찾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마블 세계에서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그렇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기원을 찾고자 시도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을 수 있다고. 그러므로 결국 그 중에서, 적어도 허무한 이름의 나열로 점철된 마블 캐릭터들과는 달리, 정체성의 기원 문제를 건드릴만한 캐릭터는 블랙팬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블랙팬서의 또 다른 의미를 마블 세계관에 등장하는 한 캐릭터의 등장으로 이해하기보다 ‘맨’으로 치부되는 그들의 ‘아무것도 아님’ 속에 채워 넣고자 하는 기원의 의미를 찾으려는 캐릭터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블랙팬서의 ‘와칸다’와 그 주변 국가들과의 이야기가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실제로 와칸다의 성립 관계(영화 속에서 언급된 5 부족과의 관계의 설명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와 ‘표범’의 등장은 브라질 원주민을 연구하여 얻은 통찰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거창한 인류 기원의 문제를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헐리웃 블록버스터로서의 마블 코믹스 영화가 억지스럽긴 해도 단순한 서사의 구조를 우격다짐 식으로 구부리려 한 흔적이 반갑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 흔적은 흔적일 뿐이다. 영화 <블랙팬서>의 의미를 그렇게 확대하기도 억지스럽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의미는 ‘테크놀로지’의 재현 즉, ‘CGI 기술력’으로 다시 몰린다. 명백한 속임수, 그러니까 총상을 입은 사람이 하루 만에 회복되는 그 속임수들은 CGI 기술력으로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게 한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상황임을 인정하지만 상상력의 사실적 재현들로 인해 그 모든 것을 참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리고 그 재현들은 단순한 신화적 서사를 그럴 듯한 대서사시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했던 ‘원주민’과 ‘테크놀로지’의 관계는 다시 말해, 블랙팬서의 ‘원주민’의 모습과 숨겨진 ‘테크놀로지’의 재현은 ‘정체성의 허무’와 ‘기술의 허무’를 다루는데 ‘원주민’의 모습은 정체성의 허무를 낙관적으로 타락시키고 ‘테크놀로지’의 재현은 기술의 허무를 비관적으로 현실화시킨다. 그런데 바로 이 낙관적 타락과 비관적 현실화는 곧바로 우리의 뇌구조를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마블 영화가 개봉되는 날은 오히려 인간 정체성의 타락과 테크놀로지의 허무를 상기시키는 기념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야 앞으로 도래할 기술의 비관적 현실화와 정체성의 낙관적 타락을 조금이나마 상기하고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적인 CGI 기술을 비판하는 것처럼 돼버린 이 글에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CGI가 강력한 착시 효과를 강화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것은 단순히 눈속임뿐만이 아니라 우리 정체성의 가치마저 허무 속에 빠트려버릴 수 있다는 심각성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오히려 마블 영화는 이런 심각성들을 대놓고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긍정적인 생각,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착각한 채로 있지 않고 마블이 만들어낸 CGI와 여러 캐릭터의 존재이유를 통해서 정체성과 기술에 관한 심각성을 끊임없이 성찰, 자각할 수 있는 시스템 속에 들어 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블 영화의 주류 담론을 많이 빗겨가긴 했지만 <블랙팬서>를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이 생각들 때문이다.

글·지승학
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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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6,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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