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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 익숙함은 사랑이 아님을, 가족이 아님을 - 영화 <B급 며느리>

영화 <B급 며느리>(감독 선호빈)는 포스터에서부터 며느리 김진영의 상황을 몇 몇 문구로 표현한다. 그 중 “명절에 시댁에 안 갔어요. 그래서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라는 말들은 그 상황을 대표하는 직설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문구들이 ‘B급’이라는 말과 뒤섞이면서 며느리 김진영을 그리 바람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하지만 동시에 며느리 김진영을 무엇으로도 속단하지 못하게 한다. 속단하지 못하게 하는 힘. 바로 그 힘은 아슬아슬하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 며느리 김진영의 모습을 담아냈던 카메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감독 선호빈이 카메라를 총으로 삼아 자신의 부인을 강하게 옭아 맨 며느리라는 의무의 족쇄를 섬세하게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 김진영을 ‘며느리’라고 규정하는 순간, 다시 말해 인간 김진영이 우리가 암묵적으로 합의해온 ‘며느리’라는 이름에 익숙해지길 바라는 순간, 이 이야기는 ‘결혼하고 보니 이상한 여자’와 살고 있는 불행한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익숙’해지지 못하면 ‘이상해’지는 상황의 폭력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익숙해지는 방법에 대해 섣불리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며느리’라는 이름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김진영의 몸부림을 바라볼 뿐이다. 그 시선은 가볍지만 몸부림은 진중하다. 

  
 
‘이상하다’와 ‘며느리’라는 단어의 조합이 마치 ‘반사회적’이라는 의미를 극단적으로 연상케하는 소위 폭력적 이해가 난무하더라도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 김진영의 모습대로라면 그녀는 ‘반사회적 무개념 며느리’로 폄하될 만한 여성이 아니다. 감독 선호빈이 제시하는 영상 안에서 바라보건대, 며느리 김진영은 육아에 대해서 혹은 남편의 일에 대해서 어떠한 문제나 갈등을 일으키는 여자가 아니다. 그녀가 곤란을 겪고 있는 거라고는 거창한 ‘가족’이 아니라 오로지 시어머니(조경숙)뿐이다. 차라리 이 영화는 ‘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문제가 있다면 하필 그녀들이 고부(姑婦)관계로 만났다는데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 누가 더 불행한가를 공평하게 따지지 못한다. 어느 한 사람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그리지 못하는 상황. 그렇다보니 갈등과 원망의 주체가 불안정하게 뒤엉키기만 한다. 
 
그 뒤엉킴 속에는, 며느리를 얻고 보니 김진영이었다는 것이 시어머니의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결혼하고 보니 시어머니가 조경숙 여사였다는 것은 김진영에게도 불운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포함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간 김진영은 자신이 왜 며느리라는 이름에 익숙해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않는다. 원치 않은 만남 속에서 어떤 이름에 부과된 의무의 익숙함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오로지 김진영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며느리 김진영을 이해할 수 있고, 시어머니 조경숙을 이해할 수도 있으며 중간에 끼인 아들이자 남편인 선호빈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미묘한 미숙함과 오해 역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 관계 속의 미숙함과 오해는 두 사람(며느리와 시어머니)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드문 것과는 반대로 영화 상영 내내 그 속을 관통하다가 결국 봉합과 비슷한 화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간의 오해는 며느리 김진영이 끊임없이 시어머니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고 시어머니 역시 그러했지만 결국 서로의 메시지를 거꾸로 읽어냈을 뿐이란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급기야 며느리 김진영이 시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며느리가 될 바엔 기꺼이 자기 자신이 B급이 되어 당연히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을 보이는 장면도 어떤 면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위험하다. 이 이해는 결국 ‘익숙함’을 바탕에 둔 채 불거지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가족관계를 의미하지도 사랑하는 사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해와 오독은 익숙함을 사랑으로 가족으로 이해하는데서 온다. 이 오해를 ‘B급 며느리’ 김진영은 증언한다. 그런데 그녀의 이 증언은 설명적이지 못해 보인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설명은 논리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집스러워 보이고 그래서 공격받기 십상이다. 남편 선호빈 역시 그런 증언을 이해하지 못하여 어느 날 갑자기 며느리 김진영이 시댁을 자연스럽게 찾아 들어가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보낸 냅킨꽂이 등의 선물로 인해 며느리 김진영의 마음이 눈 녹 듯 녹았다는 인과관계로 섣불리 이해해서도 안 된다. 모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선물이 곧 화해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라고 나는 믿고 있)고 며느리 김진영이 발길을 끊었던 시댁에 스스로 들어갔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며느리에게 죄가 있다면 그녀가 며느리가 되었다는 죄밖에 없다. 며느리라는 이름 속에 구겨 넣은 의무. 그 의무에 익숙해지기. 이를 당연히 강요하는 사회. 그 모든 연쇄는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시작되기에 이 영화는 여기에 며느리가 있다면 누구를 며느리라고 할 수 있냐고 묻고 며느리를 B급이라고 규정하면 그 사회 역시 B급일 수밖에 없다고 답하려 한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익숙함의 위선이 놓여 있다. 두 관계의 익숙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기하는 기만과 위선(감독 선호빈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비겁한 평화’). 하지만 이 영화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기만과 위선을 피해 두 사람 간의 솔직한 마음을 담는다. 그 마음 때문에 고부관계의 본질적 의미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되고 그 관계를 어떠한 도덕적 윤리적 잣대로도 멋대로 휘저을 수 없게 한다. 한 사람의 시선이면서 모두의 시선인 이야기.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이는 ‘산울림’의 1982년 곡 ‘지나간 이야기’의 가사*(원문 아래 수록)는 의미심장하다. 노랫말을 이 영화에 견주어 본다면 화자는 마치 감독이자 남편인 선호빈인 것 같지만, 돌이켜 보면 며느리 김진영, 더 나아가 시어머니 조경숙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 노래의 주체이자 화자는 가수 김창완이 아니라 세 사람 모두이다. 그래, 어차피 사람은 익숙함에서 ‘놔줘’야하고 의무에서 ‘쉬게 해줘’야 한다. 그 진실을 꼬집는 김진영의 증언과 이 영화의 가치를 나는 열렬히 지지한다.

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 

*[가사수록] 
-지나간 이야기- 

산울림 

날날날날날날 좀 놔줘요 이젠 저를 쉬게 해줘요
아름다운 그날의 추억을 고이 간직하게 해줘요
꿈꾸듯 지나버린 날들이 허무하지 않게 해줘요
어린 날 새하얗던 종이엔 예쁜 색이 칠해졌어요
지나간 이야기 참 행복했었던 것 같아요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마음 속 깊은 곳의 내 방에 그 그림들로 장식할래요
지금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너무 외로운 날도 있었죠 이젠 외로울 것 같진 않아요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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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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