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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영화평

<미드나잇 인 파라>-노장의 파리찬가

<미드나잇 인 파리>

 

노장의 파리찬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할 삶의 처연함, 겪어내는 동안은 결코 알지 못할 우리들의 화양연화.

 

 

 

미드나잇 인 파리

감독
우디 앨런
출연
케시 베이츠, 애드리언 브로디, 칼라 브루니, 마리옹 꼬띠아르 , 레이첼 맥아담스, 마이...
개봉
2011 미국,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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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일요일, 함께 놀게 된 친구가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나는 미드 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를 보자고 말했고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무슨 장르인데?”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우디 앨런 영화야”  때로는 감독의 이름이 그자체로 장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우디 앨런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사이 우연의 조각조각들에 너무도 아슬 하게 휘말리는 인물들. 가까이서 보면 개개인의 엄중한 시련이지만 멀리서 보면 찌질 하고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인생. 사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우디 앨런의 영화에는 특유의 자조와 씁쓸함이 배어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어렴풋이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브로드웨이를 쏴라’ (1994)를 보고난 직후인지도 모르겠다.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바탕의 코미디. 채플린도 그랬다. 코미디라는 장르가 진정으로 찬란해지는 순간은 수없이 뒹굴고 엉키고 덤벙대고 영욕하던 주인공들이 관객들을 정신없이 웃게 만들다가도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그들을 보고 웃으며 구경하던 관객들 스스로 어쩌면 저들의 모습이 우리와 크게 다른 것이 없을지도 몰라라고 느끼며 아찔해지게 만드는 그때에 있다는 것을. 애니 홀(1977)에서도 그랬고 사랑과 죽음(1975)에서도 그랬다. 항상 그랬다. 어떤 형식을 띄고 있던 지간에 상관없이 결국 그의 영화는 우리네 이야기였다. 그렇게 한없이 찌질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을 관조적으로 연민하던 늙은 감독은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파리라는 도시에 무릎을 꿇은 채 무한한 애정을 봉헌한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을 일컫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도무지 시간과 공간의 자장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시공간의 축 위에서 끝없이 번민하고 연민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는 사이 균일하게 흘러가던 시간은 어느새 모두를 지치고 닳게 만들어 어떤 순간에 이르러서는 전부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우주의 좌표평면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삼라만상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혹은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모습으로 시공간을 무한히 변주시키는 과정이다. 우디 앨런은 그렇게 파리라는 공간에서 타임 슬립의 방식으로 2000년 대 에서 1920년대로, 1920년대에서 다시 1980년대로 시간을 변주시키며 두 개의 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도 외면할 수 없었던 단면들에 대하여

 

 

 

 이 영화의 주인공 길 펜더는 현실이 고루하고 쓸쓸하다. 약혼녀와는 취향이 맞지 않고 그녀의 부모님과 친구들 또한 그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콜 포터의 연주가 흐르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가 이야기를 나누던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거리를 배회하던 그에게 자정이 되자 종이 울리고 푸조 자동차가 나타나 1920년대 파리로 그를 안내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동경해 마지않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만나고 모달리아니와 피카소의 뮤즈였던 아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1920년대가 파리의 황금기라는 길 펜더의 말에 불만을 토로하며 1890년대의 파리야 말로 진정 빛나는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우선 이 영화는 파리에 대한 늙은 감독의 애정이며 열렬한 찬가이다. 수 분간 파리 시내 구석구석의 풍광을 자세히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파리 그 자체이다. 한 영화를 읽어내는 독해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 인데 이 영화는 그 독해법의 하나로 오로지 파리만을 고집한다 해도 감독이 불쾌해 하지 않을 작품이다. 자신의 도시로 불리던 뉴욕을 떠나 유럽에서 부르는 파리예찬의 세레나데. 그의 전작스윗 앤 로다운의 주인공이 직접 연주한 듯 들리는 클래식 기타의 선율을 배경으로 주인공 길 펜더 (오웬 윌슨)가 러닝타임 내내 배회하는 파리의 시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독이 가지고 있는 이 형용하기 어려운 매력의 도시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해주며 관객들 또한 그의 맹목적인 파리짝사랑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러나 제 아무리 파리의 풍광이 수려하다 한들, 나는 그의 전작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무언가를 이번 작품이라고 느끼지 못할 재간이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은 자신이 동경해 마지않던 도시에서 아름다운 그 도시의 여자와 차 한 잔을 마시러 빗속을 걸어가고 우디 앨런은 그 둘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극장에는 불이 켜지고 관객들은 참 좋은 영화야혹은 좀 지루했다, 안 그래?’ 같은 말들을 나누며 각자의 시공간으로 돌아간다. 나는 이런 식의 해피엔딩에서, 우디 앨런의 해피엔딩에서 나 혼자만이 느꼈을지 모르는 그 어떤 서늘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노장의 파리찬가인 동시에 영화가 끝난 후 에도 살아 내야할 삶의 처연함, 그리고 겪어내는 동안에는 결코 알지 못할 우리들의 화양연화에 관한 영화라고.

 

 

 

 표면적으로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현실은 비루하고 별 볼 일 없으며 우리의 시공간, 특히 그의 영화가 이루고 있는 좌표평면의 어디에서도 숨을 곳 없는 삶의 처연함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끝없이 과거를 그리기 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 일게다. 이것이 시종일관 펼쳐지는 1920년대 파리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등장과 그들과의 만남에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길 펜더, 그리고 극중 약혼녀의 바람과 결별마저도 그 일들이 현실에서 차지할 실제의 비극성에 비하면 제법 경쾌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자신과 파리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는 주인공의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우디 앨런이 우리 손에 명백히 쥐어주고 싶었을 교훈이다.

 

 

 

 언뜻 분명하게 보이는 이 교훈은 몹시도 우디 앨런 적이며 또한 우디 앨런의 방식으로 교육적이다. 우리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진정 현실에 깊이 만족하며 이 현재가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기도해 본 적이 얼마나 있는가. 결국 이 영화는 현실에 만족하며 그때그때의 순간에서 행복을 찾자는 몹시 건전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장의 범작 정도로 치부 될 수도 있는 영화이다. 어느 정도의 주제의식을 노련한 연출로 만들어낸 별 세 개짜리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교훈은 우디 앨런이 창조해낸 파리에서 마지막 장면-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장소에서 딱 맞는 짝을 찾아 함께 거리를 걸어가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빛을 잃고 그 힘을 해피엔딩에 의해 상쇄시켜 버리는듯하더니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난 이 후에도 어딘가에서 지속되어야만 할 길 펜더의 삶에서 죽지 않고 끊임없이 부활을 반복하는 동시에 진정한 이야기의 종말인-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은-길 펜더의 죽음에 이를 때 까지 영겁의 회귀를 계속하며 길 펜더의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될, 나아가 길 펜더로 대변되는 우리의 어떤 삶을 지배하게 될 교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디에서도 온전치 못할 길 펜더의 삶, 어떤 시간에서도, 어떤 공간 에서도. 우디 앨런의 영화로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결코 맘 편하게 웃을 수 없을 우리의 삶. 영화는 왜 영화로만 끝나지 않을까. 영화를 가장 위대하게 만드는 힘은 동시에 영화를 가장 처연하게 만든다

 

 

 

 

 

 

과거로, 판타지로, 오지 않을 기쁜 이야기로.

 

 

 

 

 

 2000년대의 길 펜더는 1920년대의 아드리아나를 동경했고 1920년대의 아드리아나는 1890년대의 고갱을 동경했으며 1890년대의 고갱은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했다. 모두가 모두를 동경하는 한 편의 희극. 우리는 과거를 희구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보다는 다가올 시간이, 다가올 시간보다는 지나간 시간이 더 아름답다. 지나간 시간은 희극은 희극대로 추억이 되며 비극은 비극대로 박제된다. 과거는 기억으로 치환된다.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다. 우리는 흘러간 세월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대수롭지 않던 우연은 대단한 인연으로 둔갑하고 가슴 아팠던 그때의 상처는 제법 로맨틱하게 기억된다. 지나간 시간은 모든 것이 확실하며 그 확실함 또한 기록이 아닌 해석이기에 좋았던 세월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안온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는가. 우디 앨런의 작품 속에서 현실은 단 한 번도 그 자체로 온전하게 편안한 적이 없었으며 미래는 우연의 카오스가 강력하게 지배하는 불확실성의 세계였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섬뜩할 정도로 염세적인 그의 세상 속에서 현실은 하루하루 거듭되는 고단한 일상의 무의미한 대열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우리는 그가 지배하는 우주 속에서 어디라도 도망쳐야만 한다. 길 펜더처럼 1920년대의 파리로 푸조 자동차를 타고 도피하든가 그것마저 안 된다면 심지어는 영화 속으로, 다시 영화 밖으로.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뒹구는 현실과 판타지 속으로.

 

 

 

 

 

 돌이켜 보면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에서 그랬다. 1930년대 미국,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근무하는 시실리아 (미아 패로)는 영화를 보는 것으로 힘든 시간들을 버텨낸다. 남편인 몽크 (대니 에일로)는 그녀의 돈으로 술이나 사먹는 그저 그런 백수건달. 그러던 그녀는 맨해튼 상류층의 사람들이 재미없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고 그 곳에서 만난 모험가 톰 벡스터 (제프 대니얼스)를 데리고 다시 돌아오는 내용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라는 영화를 본다. 맨해튼에서 고급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영화 속 사람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살아가는 시실리아에게는 이상과도 같을 그 사람들조차 우디 앨런의 영화 속에서는 권태를 이기지 못 하고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삶의 방식과 상관없이 적용되는 매일의 단조로움. 그리고 실제로 고통스러운 시실리아의 희망 없는 일상. 그녀로 대변되는 진짜 힘든 현실 속의 우리들. 어느 날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온 벡스터. 시실리아에게 말을 걸더니 급기야 그녀와 함께 현실을 돌아다닌다. 이렇게 현실과 영화가 뒤섞이며 벌어지는 또 한 번의 소동극. 그러나 그 소동극 또한 영화다. 진짜 세계의 우리는 그 영화를 본다. 영화는 벡스터가 그러했듯, 그리고 길 펜더의 해피엔딩이 그러했듯, 스크린 밖으로 나와 우리의 자장에 영향을 끼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 중 누군가의 대변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관객의 대변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실재의 관객은 허구의 영화를 보지만 캐릭터와 서사의 기원은 애초에 영화를 보는 우리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영화는 명백한 리얼리티를 지니며 허구 속에서 우리를 대변한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시실리아가 되었든 미드 나잇 인 파리의 길 펜더가 되었든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모든 인물들은 관객과 영화적인 방식으로 동일하다. 그 동일성과 동일성을 발현시키는 영화의 방식은 그의 데뷔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1969)에서부터 가장 최근 작품인 미드 나잇 인 파리(2012)까지 이르는 무수한 그의 작품세계 속에서 구축된 것이며 앞서 언급된 미드 나잇 인 파리의 교육적인 교훈 또한 알고 보면 길 펜더를 우리의 대변자로 설정한, 영화 밖으로 뛰쳐나와 삶의 긍정을 부정하는 무시무시한 벡스터인 것이다.

 

 

 

 

 

 

 

해피엔딩의 처절한 무의미함

 

 

 

 

 

 

 

 영화의 말미에 주인공은 자신의 파리에 남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낭만의 도시에서 미인을 만나 걸어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카메라가 관망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극장엔 불이 켜진다. 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94분간 펼쳐졌던 길 펜더의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의 힘은 강력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영화의 그것이 아니라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 롱 테이크를 마지막으로 유야무야되어 버린 길 펜더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볼 겨를 따위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 롱테이크 이후에도 살아가게 될 영화 속 길 펜더의 이야기는 우디 앨런 안에서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럼 그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것이 될까. 시간은 모든 것을 지치게 만들고 현실은 비루하며 우리가 안온할 곳은 기껏해야 지나간 세월이나 영화 정도라고 냉소하던 노장이 아니던가. 앞서 말한 적 있는 이 작품의 교훈을 굳이 다시 한 번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지 말고 지금 이 현실에 만족하고 사세요!’ 정도가 될 터인데 이런 말이야 말로 지극히 무책임한 광고나 다름없다고 관조하면서도 저 것 밖에는 수가 없을지도 몰라 라고 러닝타임 내내 중얼거리던 우디 앨런이 아니던가. 길 펜더는 그 라스트 신을 마지막으로 영영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는 파리에 남아 살면서도 마지막 장면과 같은 만족감을 지속시키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어쩔 수 없는 관성에 의해 한 번 쯤 과거의 궤적을 훑어보고 그 때를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교훈의 적용대상은 시간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는 그토록 낭만적이게 느껴지던 도시에서 지겨움을 느끼고 자신의 고향인 미국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미국에서 살아가게 될 그의 제 2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 만족스러운 것일까. 미국의 공간은 다시 한 번 그를 비참하게 만들 것이고 미국에서의 시간 또한 그를 전과 똑같이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무서운 일이다. 그는 파리에서의 삶이라면 자신을 하나하나 괴롭게 만들던 그 이전과는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처럼 여겼다. 이는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삶의 단순보편적 진리를 시공간에 의해 지배받는 무시무시한 뫼비우스의 띠나 다름이 없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파리의 매력에 푹 빠져 그곳에서 살 것을 결심하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영화 이후 그가 살아내야 할 삶은 현재에서 1920년대로, 1920년대에서 다시 1890년대로 보내는 끝없는 그리움의 회귀나 다름없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파리에 염증을 느낄 수 도 있고 콜 포터의 음악을 함께 좋아하던 그 여자와 싸운 이후 예전의 약혼녀를 그리워하며 아파 할 수도 있다. 파리도 여인도 모두 얻은 채 끝이 났지만 우디 앨런의 교훈은 해피엔딩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기점으로 다시 되살아나 모두를 비장함에 숙연해 지게 만든다. 그는 분명 1920년대의 아드리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1890년대의 고갱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전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에 싫증을 느낀 채 끊임없이 과거로 답신 없을 편지를 보내게 될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해피엔딩은 무의미하다. 영화는 끝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이창동 감독의 말이다. 영화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우리가 견뎌내는 시간들 중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를 들어내어 반추하는 과정이라면 내가 너무 오독을 범하는 것일까. 무슨 영화를 보던지 간에 주인공에게는 오프닝 신 이전의 삶이 있었을 것이고 라스트 신 이후의 삶이 있을 것이다. 결국 해피엔딩은 무의미하다. 영화의 마지막 신이 보여준 행복함은 그 장면 이후에도 계속될 장대한 이야기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후 뇌리에 스쳐지나간 이창동 감독의 말과 우디 엘런이 작품을 통해 호소하는 교훈이 맞물리면서 이 영화는 급격하게 무시무시해 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저 영화 이전에도 있어왔고 영화라는 매체가 사라진 이후에도 존재할 억겁의 이야기들에게 바치는 오마주일뿐일까. 카메라가 담아낸 길 펜더의 94. 그 이후의 이야기에 이르러서야 더욱 활력을 가지며 다가오는 서사를 우디 앨런은 궁극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이후의 전개를 상상해볼 때 더욱 절실해지는 이야기였다면 관객들이 극장에서 마주했던 길 펜더의 94분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화앙연화 (化樣年華)

 

 

 

 

 

 1960년대 홍콩. 남편이 있는 여자와 부인이 있는 남자. 그 둘과 그 둘의 남편과 부인에 관한 이야기. 영화 제목의 뜻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이다. 나는 길 펜더의 비극과 동시에 이 영화를 떠올렸다. 두 영화 사이에 어떤 강력한 유대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숲 속에서 숲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는 흔한 생각을 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살아간다.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아도 우리의 이야기는 언젠가 끝이 난다. 길 펜더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끝이 나버린 서사 속에서 우리들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 언제가 될 런지는 그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존재할 반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나는 우디 앨런이 관객에게 보여준 길 펜더의 94, 바로 미드 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야 말로 그가 창조해낸 암울한 우주 속에서 주인공에 주어진 가장 찬란한 순간, 동경해 마지않던 도시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황금시대로 날아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만나는 길 펜더의 화양연화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언짢은 현재의 주변 인물들과 크고 작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한다. 주인공 역시 다르지 않다. 그의 영화 이전의 삶 그 어디에도 이처럼 놀랍고 마법 같은 일이 존재한적 있을까. 이후의 삶에서라면 존재 할 수 있을까. 설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인공이 알고 있다 해도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페라리를 모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한 동시대의 어느 감독. 그러나 자동차를 운전하는 내내 어딘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나티네, 아웃레이지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깨달았다. 자신이 페라리를 모는 그 멋진 모습을 그 자신이 운전하는 동안에는 결코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임을. 우디앨런이 반세기동안 영화를 찍으며 치열하게 맞서온 세계도, 기타노 다케시가 페라리를 몰면서 느꼈던 감정도 모두 돌고 돌아 한곳에서 부딪힌다. 페라리를 운전하는 동안에는 페라리를 모는 자신의 모습을 결코 온전하게 볼 수 없다. 그 모습이 길 펜더의 파리에서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던 소나티네의 무라카와처럼 자신의 머리에 총구멍을 들이미는 장면으로 치환되는 비극의 순간이던 그것을 겪어내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만큼은 동일하다.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길 펜더는 과거에서 안온함을 느끼고 현재에서 불안함을 느낀다. 지나가버린 시간들. 내려버린 페라리. 비록 페라리에서 내렸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운전하던 시절의 우리가 정확히 어땠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그래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페라리를 통해 그 때의 우리를 상상해 본다.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다. 과거는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지나간 그 자체로 오롯하다. 페라리에 앉아 주행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 번 석연찮은 기타노 다케시가 된다. 설사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이 길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날, 내 삶의 화양연화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달리는 동안에 우리가 이를 눈치 챌 방도는 없다. 그 길이 무엇이었는지는 차에서 내린 뒤에나 곰곰이 되새기며 짐작해 볼 뿐이다.

 

 

 

 지금 우리의 페라리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통과해 내는 이 길은 먼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끝나도 이야기는 남을 것이라는 사실도 그다지 다를 것은 없다. 기타노 다케시의 페라리도, 우디 앨런의 영화도 결국에는 돌고 돌아 마주하는 지긋한 세상에서, 영화 이후의 삶. 그리고 우리가 겪어 내는 동안은 결코 알지 못할 우리들의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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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박웅

등록일2013-02-27

조회수27,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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